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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부정공>학생공휘재현묘표(學生公諱在賢墓表)
學生公諱在賢墓表 昇州黃田坊佳長洞負艮而崇四尺者學生趙公晩年幽宅也將礱石表阡來孫秉勳太勳將門父命徵文于余謹按公諱在賢字仁居維我玉川趙系出高麗檢校大將軍諱璋爲鼻祖三傳諱元吉號農隱封玉川府院君諡忠獻享淳昌武夷祠今移享于谷城武曲祠諱瑜官副正麗亡入杜門洞罔僕自靖 世宗命旌閭美之曰孝子前副正盖井褒其忠也再傳諱智崙察訪築相好亭四昆季以長枕大被寢處不離有椿津湛樂之風生諱穩蔭直長累傳諱璟諱時述兩世昇可馬曾祖諱耘九 贈嘉善大夫戶曹參判祖諱永寬考諱元國妣延安李氏公生于 英祖乙未性度純直事父母怡愉處昆季友于與人交久而敬之居家以公於名利芬華泊然無意常恨泊於幹蠱未克力學焉乙未五月五日終配慶州鄭氏一男泓錫四女慶州鄭亨斗慶州李鎭奎全州李聲夏南原尹斗錫妻孫淇昌淇忠餘不盡擧嗚呼世間榮利無異水上洣風頭花而公之志不在乎是則亦可謂己見大意矣此足爲公之不朽耳余之蕪辭何可贅容於其間哉但誼在同根有不敢辭而撰罷如是 歲在癸卯閏四月上浣 族生 敏植 撰 학생공휘재현묘표(學生公諱在賢墓表) 승주군 황전방 가장동(昇州黃田坊佳長洞)에 四尺 높이의 간좌 무덤은 학생 조공의 유택인데, 장차 돌을 갈아 묘도에 세우고자 五세손 병훈(秉勳)과 태훈(太勳)이 문부형의 명을 받들어 묘표에 내게 청하였다. 삼가 살피건데, 공의 휘는 재현이요 자는 인거(仁居)이다. 생각하건데 우리 옥천조씨는 고려검교대장군 휘 장(璋)을 시조로 하는데 三전하여 휘 원길(元吉)의 호는 농은(農隱)이요 옥천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헌으로 순창 무이사와 곡성 무곡사에 배향하였다. 아들 휘 유(瑜)는 벼슬이 부정으로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스스로 옛주인을 마음깊이 생각하니 세종께서 정려를 정표하되 『효자 전부정』이라 하였으니, 대개 그 충성을 아울러 포양한 것이다. 재전하여 지륜(智崙)은 음보 찰방으로 상호정을 짓고 四형제가 긴 베개와 큰 이불로 침식을 함께 하여 춘진담락(椿津湛樂)의 기풍이 있었다. 그 아들 휘 온(穩)은 음보 직장(直長)이다. 여러 대를 내려와 휘 경(璟) 휘 시술(時述)은 모두 진사며 증조 휘 운구(耘九)는 증가선대부호조참판이요. 조의 휘는 영관(永寬)이요 고의 휘는 원국(元國)이며 비는 연안이씨이다. 공이 영조 을미년(一七七五)에 출생하였는데, 성품과 도량이 순직하여 부모를 섬기되, 화열로하고 형제와 우애하며 친구 사이에는 믿음과 공경으로서 사귀고 집안을 은혜로 다스리며,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부귀와 영화에는 뜻이 없이 담박하며, 항상 부모가 실패한 일을 복구하기에 골몰하여 능히 힘써 배우지 못하였다. 을미년 五월 五일에 별세하였는데, 배는 경주정씨(慶州鄭氏)이다. 一남은 홍석(泓錫)이요. 네 딸은 경주(慶州) 정 형두(鄭亨斗) 경주(慶州) 이 진규(李鎭奎) 전주(全州) 이 성하(李聲夏) 남원(南原) 윤 두석(尹斗錫)에게 출가하였고, 손자는 기창(淇昌) 기충(淇忠)이요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세간에 영화와 명리가 물위의 거품과 바람앞의 꽃과 다를바 없고, 공의 뜻이 이에 있지 아니한 즉 또한 이미 큰 뜻을 보았다 말할것이다. 이로서 족히 공의 사행이 영구히 전하겠으니 나의 허튼말이 어찌 가히 그사이에 더 용납하겠는가 다만 동종의 의리로 감히 사절치 못하고 이와 같이 가려쓴다. 족생(族生) 민식(敏植)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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